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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스타뉴스 강소현]’뭉쳐야 찬다’ 이용대가 훈훈한 외모를 자랑했다.

최근 이용대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이번주도 힘내자”라는 글과 함께 사진을 게재했다.

공개된 사진 속 이용대는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어딘가를 보며 환하게 웃고있다. 여전히 훈훈한 외모를 자랑하는 그의 모습에 눈길이 꽂혔다.

이를 본 네티즌들은 “화이팅하세요 형”, “한주도 퐈이팅입니다”, “엄머나어쩜 이리 잘생김요?”, “내동생 잘생겼네”등의 반응을 보였다.

한편 이용대는 지난 2017년 와이프 변수미와 결혼해 2년만인 2018년 12월 이혼 소식을 전했다. 당시 변수미는 이혼 사유에 대해 “성격에 따른 문제다”라고 밝혔다.

또한 변수미는 지난 5월 BJ 한미모가 성매매 알선 및 상습 도박 혐의로 고발하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한미모는 평소 친분이 있는 변수미가 엔터테인먼트 대표 A씨와의 성매매를 강요했고 필리핀 마닐라에서 상습적으로 도박을 강요해 도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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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김예솔 기자] 그룹 2PM 장우영이 살림남의 일상을 전했다.

25일 방송된 MBC ‘나 혼자 산다’에서는 장우영이 등장해 솔로 라이프의 삶을 공개했다.

장우영은 “내가 집을 공개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방송에선 처음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장우영은 2015년에 발매한 ‘우리집’이 역주행 하는 것에 감사를 표했다. 장우영은 ‘우리집’ 안무를 선보이며 상모돌리기 댄스를 공개해 박수를 받았다. 박나래는 “나도 모르게 따라갈 뻔 했다”라고 말했다.

이날 장우영은 오일 테라피를 하고 손수 누렇게 변한 빨래를 하며 살림남의 면모를 보여 눈길을 끌었다. 장우영은 “면역력이 무너져서 오일 테라피를 하게 됐다”라며 “군대에 있을 때 다들 아프면 의무대를 안 가고 나를 찾아왔다. 장박사라고 불렸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장우영은 작곡가 슈퍼창따이의 집을 찾았다. 장우영은 슈퍼창따이와 함께 요리를 시작했다. 슈퍼창따이는 호떡과 떡갈비, 채소를 올려 꿀호떡 갈비버거를 만들어 눈길을 사로 잡았다. 슈퍼창따이는 “이걸 미국 친구에게 해줬더니 너무 맛있다고 했다”라고 말했다. 장우영은 “담백, 느끼함, 단맛이 한 번에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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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창따이는 골동품 수집이 취미라며 소형 흑백TV를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장우영은 “햄버거가 좀 느끼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에 슈퍼창따이는 “지금이 바로 라면을 먹을 타이밍”이라고 말했다. 슈퍼창따이는 돼지고기와 땅콩버터, 식초, 고추, 숙주를 넣은 레시피를 공개했다. 이름은 ‘여기가 동남아’라면.

라면 맛을 본 장우영은 “대박이다”라며 “충격적인 맛이다. 향은 태국인데 면은 한국면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장우영은 “형은 가게를 해야한다”라고 말했다. 슈퍼창따이는 “됐다. 이제 가라”라고 말해 주위를 폭소케 했다. 장우영은 슈퍼창따이의 집을 나와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장우영은 집에 도착하자 소주를 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뒀다. 장우영은 “냉장고에 냄새가 나는데 남은 술을 컵에 담아 넣어뒀더니 너무 좋더라”라고 말했다. 이어서 장우영은 몸에 오일을 발라 마사지를 한 후 편안하게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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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영은 “처음에 독립할 때를 생각하면 정말 아기였다”라며 “이렇게 해야 나를 관리하고 나를 신경쓰는건데 나한테 참 무심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장우영은 “예전엔 어떻게 해야하지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내가 독립해서 사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일상을 본 장우영은 “마지막에 기안84형이 외롭지 않냐고 물어보셨다. 그런 느낌은 언제나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장우영은 “결혼은 하고 싶다. 하지만 몇 살이라고 정해두진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에 기안84는 “슈퍼창따이 형 같은 여성이랑 결혼하면 좋을 것 같다”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장우영은 “찬성이와 준호가 내년 2월에 제대를 한다. 내년에는 다같이 나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 조르지뉴
▲ 조르지뉴

[스포티비뉴스=한준 기자] 다비드 루이즈와 윌리안에 이어 또 한 명의 첼시 선수가 아스널로 갈 수 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미러는 25일 인터넷판 뉴스를 통해 첼시가 웨스트햄 미드필더 데클란 라이스를 영입할 경우 조르지뉴를 이적 시장에 내놓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프랭크 램파드 감독의 중원 영입 우선 순위는 웨스트햄의 주장 완장을 차고 뛴 바 있는 라이스다. 다만 웨스트햄이 라이스를 이번 이적 시장에는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 게 변수다.

첼시의 라이스 영입 협상은 미드필더 연쇄 이동을 야기할 수 있다. 첼시는 라이스 영입을 완료하면 조르지뉴를 판매할 생각이다.

조르지뉴 영입에 관심을 갖고 있는 팀은 아스널이다. 미켈 아르테타 감독은 중원 빌드업에 강점이 있는 선수를 필요로 한다.

아르테타 감독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미드필더 토마스 파티 영입을 원했으나 난항을 겪고 있다. 올랭피크 리옹의 주장 우셈 아우아르 영입 협상도 이적료 차이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아스널은 파티와 아우아르 영입이 어려울 경우 조르지뉴를 영입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스타뉴스 이경호 기자]
/사진제공=SBS 금토드라마 ‘앨리스’영상 바로보기

/사진제공=SBS 금토드라마 ‘앨리스’
‘앨리스’ 김희선이 주원 품에서 쓰러진 가운데, 곽시양이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했다.

지난 25일 방송된 SBS 금토드라마 ‘앨리스'(극본 김규원·강철규·김가영, 연출 백수찬, 제작 스튜디오S, 투자 wavve) 9회는 수도권 기준 시청률 7.5%(2부)를 기록했으며, 순간 최고 시청률은 8.1%를 나타냈다. 이는 토요 미니시리즈 시청률 1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뿐만 아니라 광고주들의 주요 지표인 2049 시청률은 4.1%(2부)로 동 시간대 전 채널 1위를 차지했다. (닐슨코리아)

이날 방송에서는 2021년으로 시간여행을 간 윤태이(김희선 분)가 2020년으로 돌아왔고, 박진겸(주원 분)은 생애 첫 미소를 지었다. 유민혁(곽시양 분)은 연인 박선영(김희선 분)의 죽음, 아들 박진겸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이들 3인이 마주한 엔딩은 큰 충격을 안겼다.

2021년으로 시간여행을 간 윤태이는 박진겸과 함께 했던 집에서, 2020년 자신을 기다리며 박진겸이 남긴 메모를 발견했다. 윤태이는 어떻게든 돌아가겠다는 생각에 석오원(최원영 분)을 찾아갔다. 석오원은 윤태이가 예언서 마지막 장 비밀을 쥐고 있음을, 박진겸은 예언서의 비밀을 쫓다가 사망했음을 알렸다. 이후 윤태이는 박진겸의 유품에서 고형석(김상호 분)의 수상한 행적이 담긴 USB를 발견했다. 박진겸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인 윤태이는 박진겸의 납골당에서 눈물을 흘렸다.

2020년 박진겸은 주해민(윤주만 분)의 시신을 미끼로 앨리스 일원들을 꾀어내고자 했다. 그렇게 박진겸과 오시영(황승언 분)이 마주했다. 박진겸은 2010년 엄마 박선영(김희선 분)의 장례식장을 찾았던 오시영을 기억해냈다. 오시영은 박진겸에게 총을 겨눴다. 그 순간 시간이 멈췄다. 곧바로 현장을 빠져나온 박진겸. 그 순간 윤태이의 위치가 잡혔다. 윤태이가 2020년으로 돌아온 것. 납골당으로 달려간 박진겸을 발견한 윤태이는, 그를 꼭 안고 눈물 흘렸다.

어렵게 다시 마주한 박진겸과 윤태이는 소중한 서로를 지키고자 결심했다. 그러다 윤태이의 생일이 다가왔다. 박진겸은 윤태이와 둘만의 생일파티를 했다. 마치 10년 전 엄마 박선영과 박진겸이 했던 생일파티처럼. 박진겸은 그때 박선영에게 불러주지 못했던 생일 축하 노래를 윤태이에게 불러줬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생애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박진겸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오시영을 의심하기 시작한 유민혁이 방사능 웜홀을 통과하여 태어난 아이에게는 일반인들과 다른 증상이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유민혁이 떠올린 것은 박진겸의 선천적 무감정증. 유민혁은 박진겸의 가족관계증명서를 통해, 그의 엄마 박선영이 2010년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유민혁은 바로 박선영의 납골당으로 향했다. 박선영의 납골당에는 박선영과 박진겸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제야 박선영이 1992년 사라진 자신의 연인 윤태이라는 것을, 박진겸이 자신의 생물학적 아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민혁은 충격과 슬픔에 휩싸여 처절하게 오열했다. 이후 유민혁은 박진겸을 보기 위해 박진겸의 집으로 향했다.

그때 생일파티를 마친 윤태이와 박진겸이 집 앞으로 나왔다. 그때 윤태이가 갑자기 쓰러졌다. 윤태이의 팔에는 붉은 반점들이 가득했다. 쓰러진 윤태이, 놀란 박진겸 앞에 유민혁이 달려왔다. 세 사람이 마주하며 ‘앨리스’ 9회는 마무리됐다.

이날 방송은 휘몰아치는 전개 속에 충격적인 사실들이 드러났다. 엔딩에서는 긴장감이 극대화됐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간절함이었다. 박진겸을 지키고 싶은 윤태이도, 윤태이를 지키고 싶은 박진겸도, 뒤늦게 연인과 아들의 존재를 알게 된 유민혁도 간절했다. 간절한 이들이 마주할 앞으로의 ‘앨리스’가 매우 궁금하고 기대된다.

[김종성의 히,스토리: 라이벌 열전] 김구와 여운형

[김종성 기자]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에 맞선 김구·김규식·김원봉·여운형 등은 크게 보면 동지 관계이지만, 이들 상호 간에도 어느 정도의 경쟁 관계가 존재했다. 김구와 여운형 역시 그랬다. 이들은 그 이전에 독립운동 지도자로 부각되는 과정부터 서로 판이했다.

43세의 김구가 1919년 9월 내무총장 안창호의 추천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최초로 받은 공직은 경무국장이다. 단어 자체는 경찰청장을 연상시키지만, 권한만 놓고 보면 훨씬 더한 중책이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나는 5년 동안 이 직무를 맡아 했는데, 이 경무국장 직은 신문관·검사·판사로 형 집행까지 하게 되는 직책이었다”고 회고했다.권한은 광범위했지만, 경무국장의 실제 위상은 달랐다. 도산 안창호가 경무국장 직을 추천하게 된 것은 김구가 ‘정부 문지기가 되고 싶다’, ‘독립정부의 뜰을 쓸고 문을 지키는 게 소원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때 안창호의 반응에 대해 <백범일지>는 이렇게 말한다.

도산은 쾌히 승낙하며 자기가 미국서 보니 백악관을 지키는 관리가 있었다며 백범 같은 이가 우리 정부 청사를 지키는 것이 적당하므로 내일 국무회의에 제출하겠다고 했다.

경무국장은 임시정부 청사를 지키는 직분이었다. 그 자체로 훌륭하고 의미 있는 임무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김구를 이 자리에 임명한 것은 주로 양반 출신들인 임시정부 간부들이 빈농 출신인 김구를 처음에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김구는 이렇게 ‘문지기’에서부터 시작해 독립운동 지도자 위치에까지 도달했다.진짜 ‘문지기’ 김구, 떠오르는 스타 여운형

▲  환국 직전 장제스 총통 주최 환송만찬회 때의 김구 주석(1945. 11.)
ⓒ 백범기념관

여운형은 김구보다 10살 어렸다. 지주 가문 출신으로 배재학당 같은 서양식 학교를 경험한 여운형은 1919년 3·1운동 직전에 중국에서 유학 생활과 독립운동을 병행하고 있었다.파워볼게임

1918년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한 일을 계기로 청년 지도자로 일거에 급부상했다. 여운형이 파견한 김규식은 임시정부 대표로 추인됐고, 여운형 자신은 외무부 차장으로 임시정부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여운형이 일으킨 국제적 센세이션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3·1운동이 있던 해의 11월 16일에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은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은 처음에는 그를 체포하려고 했다가 방침을 바꿔 일본에 초청해 환대를 베푸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쓴 <몽양 여운형 평전>에 이런 대목이 있다.

3·1혁명 당시 일본 군경의 무자비한 만행으로 국제사회로부터 규탄을 받고 있던 일본 정부의 유화책을 보이고자, 임시정부 수립의 핵심이었던 여운형을 초청하여 조선 문제를 논의해 보자는 정략이었다.

젊은 조선인 지도자를 초청해 자국의 관대함을 보여주자는 게 일본의 의도였다. 이런 의도의 이용물로 선택될 정도로 1919년 한 해 동안 여운형은 국제적 인물로 급부상해 있었다.

▲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 창당식에서의 여운형 선생. 피살되기 두 달 전 모습이다.
ⓒ 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여운형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자신을 이용하려는 일본을 역이용해 도쿄 한복판에서 조선 독립의 목소리를 내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결국, 그의 계산이 주효했다. 그는 일본 각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일본은 만용을 부리고 있다”라며 “3·1운동을 진압한 것은 타이타닉호(1912년 침몰)가 빙산을 무시하고 가다가 침몰하는 것과 같다”라고 강조했다.

또 일본인들을 상대로 한 대중 강연에서 타고난 웅변 실력으로 청중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 때문에 일본인 청중 몇몇이 느닷없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대형 사고’까지 있었다. 결국 하라 다카시 내각은 “내각은 대체 뭐하는 데냐?”, “이 내각이 여운형 내각이냐?”라는 여론의 질타를 받으며 지지율 추락에 직면했다. 43세의 김구가 ‘문지기 생활’을 시작한 그 해에, 33세의 여운형은 이렇게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청년 지도자로 단번에 떠올랐다.

두 사람의 위상을 바꾼 신탁통치 정국

김구와 여운형은 그 외에도 여러모로 대조를 이뤘다. 김구가 민족주의 노선을 걸었다면, 여운형은 사회주의에 기우는 모습을 보였다. 김구가 폭탄을 앞세우는 무력투쟁의 길을 걸었다면, 여운형은 국제연대 활동을 하다가 조선중앙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며 국내 활동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였다.파워볼

이처럼 서로 다른 면모를 보여준 김구와 여운형은 해방정국에서는 이승만에 맞서 민족통합을 추구함으로써 크게 볼 때 동지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두 사람 사이에는 경쟁이 있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정국 하에서 특히 그랬다.

그달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3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발표된 내용은 ‘한국을 독립시키기 위해 임시적인 한국민주주의정부(a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를 수립하고, 남북을 각각 점령한 미·소 양군의 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 구성을 지원하며, 미소공동위원회가 임시정부와 협의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 지원 하에 남북 단일의 임시정부를 구성한 뒤 최고 5년간의 4개국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 합의의 요체였다. 그런데 이것은 3상 회의 발표 전날 발행된 27일 자 <동아일보> 기사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을 통해 ‘미국은 즉각 독립을 지지한 데 반해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엉뚱한 내용으로 보도됐다.

이 보도는 엄청난 폭발력을 일으켰다. 한국인들의 가슴에 잠재된 뜨거운 무언가를 한꺼번에 들춰내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좌·우 할 것 없이 한국인 대다수를 분노하게 한 것이다. 1945년 12월 31일 자 <동아일보> 기사 ‘전국에 반대열(熱)’에서 보도된 것처럼, 28일부터 한국의 주요 도시들은 뜨거운 반대 운동으로 달아올랐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오보가 분노를 배가하기는 했지만, 한국인들이 꼭 그것 때문에만 분노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이 신탁을 주장했다고 보도했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35년간의 지긋지긋한 일제 지배가 끝난 마당에 4개국의 지배를 더 받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민족적 정서에 가장 기민하게 대처한 인물이 김구다. 한 달 전인 11월 23일 임시정부 주석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 정치적 위상이 위축돼 있었던 김구는 미군정이 불허한 임시정부 주석 직함을 내걸고 반탁운동을 조직했고, 이는 그를 거대한 회오리바람의 중심에 서게 했다.여운형은 그 회오리바람에 동참하고자 했다. 그가 이끄는 인민공화국(인공)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임시정부(임정)에 반탁운동을 위한 조직 통합을 제안했다. 1988년에 <한국정치학회보> 제22집 제2호에 실린 심지연 경남대 교수의 논문 ‘반탁에서 찬탁으로 – 남한 좌익진영의 탁치관 변화에 관한 연구’는 당시 발행된 <조선인민보>를 인용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공 측은 민족통일의 저해 요인이 인공과 임정의 병립에 있으며 민중들은 양자의 동시 해체를 요구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양측의 대표들로 통일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운동에 신속히 동참함으로써 이슈의 변방으로 밀려나지 않으려는 여운형과 인공 측의 의도가 실린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 제안은 거부됐다. 인공이 1월 1일 발송한 통합제안 공문은 당일 오후 6시 반송됐다. 김구와 임시정부는 정부 형식을 띠는 인공과의 통합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이미 주도권을 쥔 상황에서 굳이 좌파에 지분을 내줄 필요가 없다는 계산도 작용했던 듯하다.

이것은 김구와 여운형이 신탁통치 정국에서 경쟁 관계가 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김구의 퇴짜를 맞은 좌파 내지는 진보 진영은 급박한 상황에서 살아남고자 독자노선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인공과 공산당이 포함된 좌파 진영의 선택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선회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A) 신탁통치를 협의한다(B)’는 3상 회의 결과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이들은 B보다 A를 부각하는 방법으로 찬탁의 명분을 세웠다. 3상 회의 결과를 받아들이면 남북 단일의 임시정부 수립이 가능하므로 찬탁이 손해가 아니라는 쪽으로 논리를 정비한 것이다.

이로 인해 김구와 여운형은 찬탁이냐 반탁이냐를 놓고 대결하게 됐고, 이 대결의 결과는 김구의 승리로 끝났다. 대중의 마음을 잡은 쪽은 여운형의 논리가 아니라 김구의 논리였다. 대중의 눈에는 반탁에서 찬탁으로 방침을 선회한 좌파의 태도 역시 명분이 없어 보였다.

3상 회의의 결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는 했지만, 이것은 한국인들의 반탁 열기 속에 녹아버리고 말았다. 4대 강대국의 합의 사항마저 녹여버릴 정도로 한국 민중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것은 좌냐 우냐로 재단할 수 없는 한국 민중 나름의 셈법이었다.파워볼사이트

라이벌들의 대결은 보는 이의 흥미를 돋우지만, 어떤 라이벌 대결은 보는 이를 서글프게 만든다. 거대한 악당을 공동의 적으로 두고 있는 두 사람이 대결하거나, 대결보다는 화합을 해야 할 두 사람이 대결하는 경우에는 관객이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김구와 여운형의 경쟁도 그랬다. 이들의 대결은 민족분단을 반대하는 진영의 역량을 분산시켰을 뿐 아니라, 친일파들이 반탁운동에 가담해 애국자로 둔갑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벌어지지 말아야 할 라이벌 대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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